초색다 草色多
Solo Exhibition: Grass Is Greener
@ 사이아트 스페이스 Cyart Space [2017]
글: 이승훈(사이미술연구소 소장)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우리는 외부와의 지속적인 교류와 소통으로 자신의 존재와 관계적 의미를 확인한다. 메시지가 유통되는 소통에는 반드시 매개가 필요하고 이 과정에 언어 기호가 가장 보편적으로 동원된다. 그러나 언어의 기의와 기표는 완전한 합일에 이르지 못한 채 늘 평행선을 달리고 인식 또한 언제든 오류의 불씨를 남기고 있다. 우리의 생각과 대상의 의미를 투명하게 반영하는 완벽한 수단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재현하는 현상의 본질은 늘 주관적 해석이 전제된 선별적 추출, 재구성, 편집을 거쳐 투사한 일종의 스크린 위의 가상이다.
이소윤은 줄곧 ‘소통’이라는 주제에 천착하여 나와 타인, 세상과 상호 작용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주관적 번역과 해석에 대한 문제의식과 소통의 필수적인 매개인 기호가 가진 생래적인 한계에서 오는 다양한 어긋남과 모순들에 대해 사유의 영역을 확장시켜 왔다. 주로 드로잉이나 일상적 오브제의 수집과 재조합에 의한 ‘공간적 콜라주’ 작업에서 최근에는 페인팅, 프린트, 수공적 설치 작업 등으로 매체와 형식적인 면에서 폭넓은 선회를 보이고 있으나 기존의 주제의식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
‹You are All Part of the Same Rainbow›은 7점의 회화 작품으로, 무지개의 7가지 색들이 각 점당 한 가지씩 비중 있게 사용되었으며 화사하고 선명한 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추상화로 이루어져 있는 이 작업은 조형적 분석보다는 일상에 대한 인식론적 문제를 되짚어보게 하는 암시적 제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지개는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일곱 가지 색깔로 구성되어 있는 것인가? 실제로는 색과 색 사이가 무한에 가깝게 변화해 프리즘으로 분광한 것을 분석하면 몇 만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훔볼트의 지적대로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언어(혹은 특정 프레임)가 틀지어주는 대로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지 모른다. 과거 동양에서는 ‘오색’으로 구분하였고 영미권에서는 ‘남’이 빠진 6색이, 또 다른 문화권에서는 4색, 3색으로 통용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흰색 무지개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니 우리가 공식처럼 외웠던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빛깔 무지개는 협소한 인식의 울타리 안에 떠있는 우리들만의 무지개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인식 혹은 페인팅) 프레임 속 무지개가 비추는 극히 일부의 색면 구성에서 외부에 머물러 있을, 보이지 않는 수만 가지 빛깔로 상상적 시선을 돌리게 된다.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가 ‘지각에 있어서 채워넣기filling in perception’라고 설명한 이러한 주관적 해석 과정에는 주지하다시피 우리 내면에 이미 축적된 경험과 지식, 언어, 문화, 가치관, 이데올로기 등의 총체적 체계가 관여한다. 이러한 선이해는 우리가 지각하는 짧은 순간에도 작용하는데 하물며 사고, 판단, 상호작용, 소통 등에 있어서는 얼마나 복잡다단한 해석적 필터가 개입되겠는가?
기억에 의한 사실의 재현은 과거와 현재 간의 소통이다. 이는 시간을 역행하여 추적한 흔적이기에 그 생생한 현장성을 상실함으로써 더욱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다. 때론 선명하게 자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감가상각되며 현재적 시간과 주관적 맥락에 대입하여 덧대어지기도 파기되기도 하기에 실제 내용과 유사할 수는 있지만 필연적으로 차이를 갖는다. 동일한 사실에 대한 다수의 기억일 경우에는 다양한 번역들이 쏟아지고 그 공유와 소통은 무한히 미끄러지게 마련이다. ‹사랑할수록 더 멀어져간다›는 작가의 가족 여섯 명이 함께 했던 어느 특정한 시절에 대한 기억과 회상을 담고 있는데 동일한 과거에 대해 각기 다르게 구성된 이야기들은 마치 팔림프세스트palimpsest의 글쓰기처럼 거울 표면에 중첩되어 결국 읽을 수 없는 텍스트가 되어버렸다. 실재의 재현은 언어 기호들 간에 존재하는 차이의 재현이므로 실재와 재현의 간극을 메우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과거의 실재는 회상 주체들의 주관적 프리즘으로 인해 다양하게 산포되는 이본異本들이며 기억을 공유하려는 주체들은 서로 어긋난 조각들을 대조할 뿐이다. 거울이 표면의 미세한 굴곡으로 인해 어떠한 왜곡 없이 완벽한 순도로 반영하는 상을 결코 비추지 못하듯이 말이다. 그나마 허약한 재질로 인해 거울의 반영상은 늘 위태롭다. 여기서 나르시시스트적 텍스트는 거울 속에 갇혀 소통의 파국을 맞는다.
실재와 기호, 인식체계 간의 괴리와 모순은 만화경萬華鏡을 연상시키는 프린트 작업, ‹아름다운 엔딩 위하여›에서 또 다른 양상으로 드러난다. 작가가 직접 촬영한 사진 또는 인터넷이나 잡지에서 캡쳐하거나 스캔하여 수집한 수백 가지의 꽃 이미지는 상하좌우를 뒤집고 중첩시키며 배열하는 공정을 거치면서 그 고유한 형상이 마치 보잘 것 없는 얼룩처럼 불특정한 형태로 왜곡된다. 대칭의 논리와 수학적 배치에 의해 꽃의 고유한 형상을 넘어선 예측불허의 변형된 이미지를 무한대로 담아내고 있는 본 작업은 고대 중국에서 ‘완후아통萬花筒’이라고 불렸던 만화경의 기원적 의미처럼 수만 가지의 꽃이 피어나는 환상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시각적 착시의 원리로 끊임없이 왜곡되는 이 가상의 이미지는 우연적 조합이 거듭될수록 꽃 본연의 자연미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지지만 그러한 변형의 무한증식이 거듭될수록 원래 꽃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보다 더 매혹적인 꽃의 황홀경에 빠져들게 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이소윤의 이번 신작에서의 큰 변화를 꼽자면, 그간 본인 작업 자체가 언어를 비롯한 일반적인 기호의 의미작용과 소통 중에 유발되는 한계와 딜레마를 다루는 과정에서 전달했던 복잡하고 난해한 이야기들이 타인(수용자)에게 도리어 또 다른 오해와 난독을 유발한 건 아닌지 자기 반영적 성찰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작가는 ‘예술을 함’에 있어 그간 유폐시켰던 ‘시각적 즐거움’을 되찾기 위한 가장 직관적인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소통불능의 여지가 말끔히 해소된, 이상적인 풍경을 보여주고자 한다. 여기서 작가는 ‘소통의 극치’에 대한 비유로 온갖 꽃과 보석으로 휘황찬란하게 장식되었으며 삼라만상이 최상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를 뜻하는 불교 용어 ‘화엄華嚴’을 떠올렸다고 한다. 조화와 소통의 최상의 경지라는 추상적 관념을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야생화의 군락지와 같이 오만가지 꽃들이 어떠한 우열과 갈등 없이 각각의 고유성을 간직한 채, 드넓은 공간에서 상생하며 조화롭게 어우러진” 구체적 풍경으로 시각화하는 것이다. 꽃의 형체가 어렴풋이 남아있는 다채로운 색 덩어리로 꽃의 군락을 반추상적으로 재현한 ‹When It Rings›는 화엄 그 자체를 구현한 듯 화사하게 만개한 꽃들로 장식적 구성을 이루고 있다. 작가는 화엄이 전하는 심원한 사상적 관념을 반영한다기보다 삼라만상의 조화의 정수를 표상하는 화엄적 풍광이 주는 벅찬 감동과 충만한 감성을 자연이 선사하는 짙은 녹음이나 화사한 색감이 펼쳐져 있는 경치, 평화롭고 조화로운 광경에 투영시켜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큰 회화 옆, 주석처럼 나란히 걸려있는 색채 그라데이션의 작은 회화는 ‹When It Rings›에 쓰인 색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실재의 잔재처럼 알맹이 없이 색상의 채도나 명도로만 함축된 인덱스로서 꽃 군락을 재현한 큰 그림을 다시 지시함으로써 실재로부터 이중 지연을 일으킨다.
건너편의 ‹We Won’t Talk Any More›에는 온갖 화려하고 선명했던 다채로운 색상들이 모두 탈색된 듯 밋밋한 무채색의 꽃들로 채워져 있다. 표면이 거칠고 어지럽게 겹쳐져 있는 투박한 질감의 꽃들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화사하고 연약하며 선이 고운 꽃들과는 상반된 느낌을 준다. 불규칙하고 무질서하며 비루한 흑백의 꽃의 군락은 일견 혼돈에 가까운 광경이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감지하지 못할 뿐, 자연은 복잡함과 혼란 속에서 나름의 정돈된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소윤에게는 상충되고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융화하면서 작동되는 카오스모스 또한 조화와 소통이 관류하는 세계이다. 작가는 두 평면작업의 관계를 통해 모든 사물과 현상이 추와 미, 정상과 비정상, 우열의 구분 없이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 서로 공존하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상호 관계와 소통의 모든 어긋남에서 해방된, 궁극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다룬 또 다른 극적인 풍경은 지하 전시장 중앙 천장을 차지하고 있는 에서 절정에 이른다. 허공을 수놓고 있어 올려다보아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Hanabi›. 밤하늘에 혜성과 같은 순간적 섬광으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형형색색의 불꽃놀이에서 작가 이소윤은 위에서 상술한 동일한 맥락에서 ‘화엄’과의 유비적 관계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Hanabi›는 아크릴 템플릿을 이용하여 꽃 모양대로 잘라낸 꽃 형상과 잘려진 빈 틀을 나란히 매달아 놓은 설치 작품이다. 형판, 견본이라고 불리고 일명 모형자 또는 도형자라고도 하는 템필릿은 마치 도구적 언어 기호가 그러하듯 동일한 도형이나 모양의 틀로 다양한 구성과 조합, 편집을 통해 무궁무진한 원본을 만들어낼 수 있는 매체이다. 산업적으로 대량생산된, 그리고 형상을 대량으로 양산할 수 있는 탬플릿(꽃과 꽃 틀)이 갖는 특성 때문에 언뜻 ‘코드‘에 따라 대량복제된 꽃들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공적 방식으로 800여 가지의 도안을 드로잉하고 그 모양의 본대로 컷팅하여 각각 다른 꽃들을 만든 노작의 결과물로서 매체적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실제 불꽃놀이와 달리 이소윤의 ‹Hanabi›에서는 인공적인 빛을 매개로 반투명한 꽃들이 서로 빛을 반영하고 굴절시켜 벽면으로까지 그 상들이 투영된다. 공기의 흐름과 보는 위치에 따라 다채로운 모습을 보이면서 잇따라 반짝이는 꽃 형상들과 벽면에 찬연하게 파편화된 잔영들이 광학적 환영을 만든다. 각각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꽃들이 빛의 유희에 참여하면서 더욱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반영 이미지로 채워진 공간은 마치 깨달음의 본질인 빛에 의해 드러난 화려하고 장엄하며 아름다운 세계를 마주하는 듯하다. 깨달음의 순간,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휘황찬란한 보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듯이 말이다.
빛을 투영했을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발현하는 템플릿 꽃들은, 그 투명한 표면에 서로가 서로를 비추면서 반영하는 무수한 빛과 이미지들이 상호 침투하고 교차하는 무한한 관계의 ‘인다라망因陀羅網’을 연상시킨다. 그물 매듭마다 표면이 거울과 같이 빛나는 형형색색의 보주가 각각의 다른 모든 구슬들을 비춰볼 수 있다는 인다라망의 화원에서(실제로 철망 그리드에 꽃들이 매달려 있다) 이 모든 불꽃들은 자기 완결적으로 자립하고 고립된 채 존재할 수 없기에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차등 없이 각각의 고유성을 간직한 채 융화하며 이상적인 풍경을 이룬다.
의도하던 의도치 않던 해석 의존적인 동시대 미술작품은 현대예술의 조건이라는 명분 아래 (철학적) 관념을 과잉되게 끌어안으며 수용자들을 소통에서 소외시키는 경우가 많다. 소통이라는 주제를 다뤄온 작품 자체가 무수한 개념적, 철학적 해석들을 요구하면서 오히려 오역을 낳고 불통을 유발할 수 있다는 자기 성찰적 인식으로부터 출발한 이소윤의 최근 작업들은 이상과 현실 사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을 법한 이러한 풍경을 통해 서로 다른 지평에서 연동되는 다층화된 해석의 스펙트럼에서 가능한 이상적 소통이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하며 찾아가는 과정이다.